신정훈 (참바람)
올 3월에 학교를 옮기고 교무에 과학 전담을 맡게 되었다. 과학을 3,4,5,6학년 전담으로 해본 경험이 없어 걱정도 되고, 힘들 것도 같았지만, 뭐 또 이번 기회에 좋은 경험 해보자 싶어서 맡게 되었다.
3,4월 동안 3,4,5,6학년 아이들을 만나면서 ‘마음리더십’에서 익혀온 ‘모습 알아주기(내가 만든 말이다. 친해질 때 아이들의 옷, 머리모양, 신발색깔, 머리띠모양, 달라진 모습 등을 관찰해서 말해주는 것), 마음 알아주기, 사람 알아주기’를 가랑비에 옷 젖듯이 꾸준하게 사용했더니 예년에 비해 빠른 속도로 친밀감과 신뢰가 형성 되는 듯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3학년 과학 수업 중에 문득 내 맘속에 부글부글 올라오는 소리가 하나 들렸다. '어쩌라고!'
인영: 선생님, 동현이가 자꾸 저 보고 연필 빌려달라고 해요.
나: (‘그래서 어쩌라고, 나보고 뭘 어떻게 해달란 말이야, 하고 싶은 소리가 뭐지, 정말 나한테 하고 싶은 소리가 뭐냔 말이야?’ 하는 생각이 들면서 요번 기회에 애들이 자기 소리를 할 수 있도록 지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인영아, 그래서 어쩌라고?(차분한 목소리로 말한 후 잠시 기다림)
인영: (당황, 놀라면서 울먹울먹하더니) 흑흑
나: 인영이가 샘 얘기 듣고 놀라기도 하고 겁도 나고 해서 눈물이 나는 모양이네. 울고 싶을 땐 편하게 울어도 된다. 다른 친구들은 수업 계속해도 괜찮겠나?
다른 친구들: 예, 괜찮아요.
이어서 수업을 하고, 몇 분 쯤 지나자 인영이도 머리를 들고 다시 수업을 하는데 표정이 괜찮아 보인다.
나: 인영이는 좀 괜찮아진 거 같은데 어떠노?
인영: 예, 괜찮아요.
나: 인영이가 아까 운거는 샘 말을 듣고 무섭거나 겁나서 그런 거가?
인영: 무섭진 않고 겁은 조금 났어요.
나: 그랬구나, 겁이 났다니 미안하네. 지금은 어떠노?
인영: (새글새글 웃으며)지금은 좋아요.
나: 좋다니 나도 좋네, 그러면 인영이한테 얘기할 게 있는데 들을 수 있겠나?
인영: 예.
나: 아까 인영이가 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동현이가 자꾸 연필 빌려 달라하니 그러지 못하게 해달라는 건지, 아니면 귀찮게 하니깐 혼내달라고 하는 건지, 또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샘한테 도움을 받고싶은 건지, 인영이가 정말 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찾아서 하면 샘도 잘 알아듣겠는데 말이야.
인영: 아~ 그러네요. (말하면서 씨익 웃는다)
나: 그러면 아까 하고 싶었던 말이 뭐였는지 해볼래?
인영: 자꾸 빌려달라 하는데 저는 빌려주기 싫거든요. 빌려주기 싫다는 거요.
나: 아~그러면 그 말은 샘한테 하는 거가 동현이한테 하는 거가?
인영: 동현이한테 하는 거요.
나: 그래. 아마 동현이한테 직접 말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인데, 지금 하는 걸보니 충분히 할 수 있겠는 걸?
인영: 예. (웃는다)
나: 울다가 웃으면 어디어디에 뿔이 난다는데 괜찮은지 모르겠다.
인영: 에이. (인영이도 웃고 다른 친구들도 웃는다.)
나: 다른 친구들은 인영이랑 샘이랑 얘기하는 거 조용히 들어주고 기다려줘서 참 고맙다. 인영아 다른 친구들이 조용히 기다려주는 거 보니 어떻노?
인영: 고마워요.
나: 다른 친구들은 고맙단 말 들으니 어떻노?
여러명: 기분 좋아요.
나: 좀 지루하고 지겹기도 한 친구들도 있을 거 같은데.
민선: 저는 좀 그랬어요.
나: 그래. 그런데도 우째 그렇게 조용히 기다려주노? 참 대단타.
민선: (웃으며)재밌기도 했어요.
나: 그랬나? 다행이다.ㅎㅎ 샘이랑 인영이 얘기하는 거 다른 친구들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 거 같은데, 한번 얘기해볼 친구 있나?
지수: 샘한테 하는 건지, 친구한테 해야하는 말인지 나누어서 하는 거요.
나: 오호. 그런 생각이 들었나, 반갑구나.
( 그 뒤로 몇 마디를 더 주고 받았는데 기억이 안남)
예전에는 이런 경우에 교사인 내가, 상황이나 학생들의 상태를 보고 헤아리고 판단해서 뭔가 말을 했던 거 같다. 불편한 상황, 갈등상황 등으로 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는 말이다. 이번엔 오히려 솔직하게 얘기하고 그런 상황이 되더라도 맞이해서 풀어나갈 수 있었던 점이 참 좋았다.
에필로그
이후에 이 3학년 반에는 ‘어쩌라고!’ 라는 말이 한동안 유행이 되었다. 수업시간에 '샘 누가 저 때렸어요' 하면 다른 녀석이 '그래서 어쩌라고', '동현이한테 직접 말해야지' 등등 서로서로 관여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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