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민 (인디언)
평소 역사 수업에서 <친일 청산> 같은 논쟁적인 주제를 다룰 때마다 아쉬움이 있었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교사의 평가나 감정을 전달하는 걸 넘어설 순 없을까? 교사가 아니라 아이들이 판단하고, 아이들이 감정을 느끼는 수업을 하고 싶었다.
<친일파 청산에 대한 수업>
대표적인 친일 반민족행위 피의자 한 사람에 대한 자료를 주고 아이들이 직접 판결해보게 하였다. 자료의 왼쪽에는 반민법 조항을, 오른쪽에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받은 한 인물에 대한 조사 자료를 실어두었다. 아이들에게 반민 법정의 판사가 되어 이 사람이 일제 강점기에 한 행동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그리고 유죄라면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지 판결해보라고 안내했다.
모둠 활동 뒤 아이들에게 물었다.
교사 : 자, 이제 같이 얘기해볼까요? 이 사람은 일제 강점기에 어떤 일을 했죠?
영현 : 비행기 공장을 만들어서 비행기를 일제에게 바치려고 했어요.
은수 : 친일 단체에 가입했어요.
명진 : 일제에 20만원을 기부했어요.
교사 : 아, 비행기 공장도 운영하고, 식민 정책을 돕는 단체에 가입도 하고, 그 단체에 기부도 했네요? 먼저, 이 사람이 무죄라고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 이 사람이 유죄라면 반민법의 어떤 조항을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영현 : 4조 7항 ‘비행기, 병기 또는 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 경영한 자’요.
교사 : 음, 비행기 회사를 운영했으니까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그런데 이 사람은 신문 조서에서 비행기 회사를 만든 거에 대해서 ‘총독부에서 나를 이용했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민철 : (비행기 회사 만들 때 설립 취의서에) ‘황은에 욕하여’라고 하고, ‘황군정강에 새로운 위력을 더할 때라’ 같은 말을 한 걸 보면, 강요가 아닌 것 같아요.
교사 : 그 표현을 보면 강압이 아니라 자의에 의한 걸로 볼 수 있다는 말이죠?
민철 : 예.
교사 : 그럼 이 사람은 어떤 벌을 받아야 할까요?
은호 : 사형요.
교사 : 어? 사형요? 사형은 1조에 해당하는 건데 이 사람은 4조 7항에 해당한다고 그랬죠? 군수 공업 경영은 어떤 벌에 해당하죠?
아이들 :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15년 이하의 공민권 정지요.
재산 몰수요.
교사 : 그럼 이 사람에게 어떤 벌을 내리겠어요?
정훈 : 징역은 안 돼요.
교사 : 어? 징역은 안 돼? 왜요?
정훈 : 징역 들어가면요,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 잘못한 것도 모르니까요. 사람들이 ‘저 새X 친일파다’라고 욕 먹게 해야 돼요.
교사 : 이 사람 행동에 화가 많이 났나 봐요? 그럼 징역 말고 공민권을 정지시켜야 한다는 말인가요?
정훈 : 예.
건우 : 이 사람, 진짜 있었던 사람이에요?
교사 : 예. 이 사람은 일제 강점기 때 화신백화점을 운영했던 박흥식이에요.
그러자 아이들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교사 : 박흥식은 일제 강점기 때 화신 백화점을 운영한 유통 갑부였어요. 자, 이 사람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죠?
아이들 : 예.
교사 : 실제 재판에서 이 사람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로 풀려나요.
아이들 : 와, 어이 없다.
헐.
<암살>이네.
교사 : 영화 <암살>에서도 이정재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죠? 이 사람도 그랬어요. <암살>에서는 무죄로 풀려난 이정재를 암살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무죄로 풀려나는 게 실제 역사죠. 박흥식은 반민특위에서 가장 먼저 잡아들인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반민특위에 대한 얘길 이어갔다. ‘반민특위에서 체포한 반민 피의자가 305건, 재판이 종결된 게 38건, 그 중 사형 1명, 무기징역 1명, 징역형은 12명인데 그 중 5명은 집행 유예이고, 실형은 7명…’ 그러자 아이들이 술렁거렸다. 어이없고 황당하다는 반응들이었다. 친일 경찰 노덕술이 체포된 뒤 이승만 대통령이 ‘좌익 반란 분자 색출 경험이 풍부한 경찰관을 마구 잡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담화문을 발표한 일, 반민특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공산당과 내통했다는 구실로 구속된 일,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일, 반민특위 활동 기간이 단축된 일도 말해주었다. 아이들은 분개했다. 그리고 물었다.
아이들 : 아직까지 살아있는 친일파가 있어요?
사형 1명은 누구예요?
내 판단이 담긴 지식을 전달하는 대신 아이들에게 역사적 상황 속에 들어가는 경험을 해보게 만드는 수업의 틀을 계획해 보았다. 오늘 그런 수업을 시도할 수 있어서 흡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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