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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입을 매우 쳐라

알 수 없는 사용자 2021. 10. 6. 11:20

저 입을 매우 쳐라

교사 2년차 기간제 교사 시절, 개학하고 한두 달 지날 무렵 기간제 교사 예닐곱 명이 모여 함께 저녁을 먹고 차를 마셨다.
카페 2층에 자리잡은 우리는 종이에 주문 내용을 적어 정리했고, 같은 교무실에서 근무하는 K와 함께 1층으로 가 음료 주문을 했다. 결제는 내 카드로 했는데 그때 나는 ‘이건 내가 사야지’하고 생각했다. 내가 사야 할 어떤 이유나 맥락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순간 내가 사고 싶었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한창 나누었고 그날의 분위기는 그런 대로 화기애애했다. 모임이 마무리 될 무렵 한 선생님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모습으로 “참, 이거 누가 계산했어요?”라고 말했다. 엔빵을 하기 위해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보통 한 박자 느리게 답하는 스타일인데, 그 한 박자가 채 지나기 전에 K가 불쑥, 약간 허세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거 제가 사는 거예요.”
나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오오 이 사람이 이런 농담도 할 줄 아네.’ 어어 그런데 10초가 지나고 1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이거 실은 한창호 선생님이 계산하셨어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거 뭐지? 쟤 왜 그 다음 말은 안 하는 건데?’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모임이 다 끝나도록 K에게서 그 말은 나오지 않았고 나 역시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그렇게, K가 샀다고 하는 차를 마시고서 우리는 헤어졌다. 헤어질 때의 K 표정은 “뭐 무슨 일 있었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또 다른 어떤 날.
나는 당시 학생부와 예체능부 선생님 십여 명이 사용하는 교무실에서 근무했는데, 점심을 먹고 교무실에 와보니 K 혼자 있었다. K는 나에게 “A 선생님이 선생님들 드시라고 아이스크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셨어요.”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알았다고 하고 내 자리에 앉았다.
5분에서 10분쯤 흐른 무렵 또 다른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그 분이 냉장고를 열어보고는 “어? 이거 웬 아이스크림이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K는 너무도 태연하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사왔어요.”
하..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기가 막히고도 어이 없는 시츄에이션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거짓말도 거짓말이지만, 이건 지금 나를 농락하는 거잖아.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나는 이번에도 그냥 지켜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 거짓인 줄 뻔히 아는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 하는 사람을 난생 처음 겪다보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고 하면 이건 뭔가 손쉽게 합리화를 하는 것 같다. 나는 그때 분명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선생님, 방금 전에 A 선생님이 사온 거라고 저한테 그러셨는데 지금은 선생님이 사왔다고 하시네요? 뭐가 사실이죠?”
그리고 더 나아가 지난 번 일을 함께 언급하면서 그때 내가 느낀 의아함이나 불쾌함을 표현하고,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에 대해 모욕감마저 느낀다고 표현했어야 한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매우 쳐야 할 입은 K의 입이 아니라, 두 번의 상황 모두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스스로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나의 입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왜 그 때, 두 번씩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있었던 걸까.
묵언수행 중이었을까?
허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