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원 (온돌)
방과후 연우가 찾아왔다.
*나 : 오! 연우 왔구나.(최대한 밝고 반갑게 맞이했다.) 고맙다야. 약속 지켜줘서.
*연우: 네. 뭐.
*나: 오면서 마음 불편하진 않았어? 빨리 가고 싶은데 못가서 짜증난다거나. 불편한 소리 듣거나 혼날 것 같아서 오기 싫었다거나.
*연우: 빨리 가고 싶긴 해요.
*나: 그래. 밖에서 친구도 기다리고 빨리 가고 싶겠다. 선생님은 이왕에 이렇게 온 김에 이 시간을 잘 썼으면 좋겠거든.
*연우: 오래 걸려요?
*나: 아! 그래. 시간. 혹시 어느 정도의 시간이면 괜찮겠니?
*연우: 10분이요.
*나: 10분? 그래! 좋구나. 선생님도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10분 정도면 너도 괜찮겠니?
*연우: 네.
*나: 그래. 우리가 이제 10분을 쓸 건데, 어차피 쓸 시간 우리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서로 편하고 좋을 수도 있고 정반대일 수도 있거든. 선생님은 대화가 잘 되어 서로 편안했으면 좋겠어. 너는 어때?
*연우: 네. 그래요.
*나: 그래. 안심된다. 음... 선생님이 너를 부르고서 어떤 걸 하고 싶은지 마음을 곰곰이 들여다봤어. 그랬더니 혼내고 싶은 것도 아니고, 사과 받고 싶은 것도 아니더라구. 우리 계속 수업시간에 볼 꺼잖아. 너도 선생님도 서로를 불편한 맘 없이 편안하게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기더라구.
*연우: 뭐 불편한 거 없는데요.
*나: 그래? 선생님한테 불편한 거 없어?
*연우: 네.
*나: 그렇구나. 좀 안심이 된다. 그런데 아까 우리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상처 받았다고 말하면서 순간 정색했는데 그때 마음 불편하지 않았니?
*연우: 아무 생각 없었는데요.
*나: 그랬어? 선생님은 순간 네 표정이 어두워져서 네가 맘 상한 거 아닌가 생각했거든.
*연우: 제가요? 저 원래 표정이 어두워요.
*나: 진짜? 너 웃을 때 진짜 밝고 예쁘게 웃는데. 모르는구나?(좀 뜬금 없지만 아까운 맘이 들었다. 활짝 웃을 때 밝아보이고 이뻤는데)
*연우: ... (미묘한 표정)
*나: 그래. 그 순간엔 표정은 어두워 보였지만 인식된 불편한 맘은 없었단 이야기지?
*연우: 네.
*나: 선생님이 이야기 하자고 했을 때 싫다고 해서 샘은 맘 상한줄 알았어.
*연우: 그땐 애들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나: 그랬구나. 그러면 혹시 선생님한테 이야기 하고 싶은 거나 이해받고 싶은 거 없니?
*연우: 별로 없어요.
순간 당황되었다. 아이는 그냥 덤덤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막 뻗대고 말을 툭툭 뱉을 줄 알았는데... 게다가 보건실 청소하러 오는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왔다갔다해서 중간중간 대화는 끊기고 정신이 없다. 어떻게 이야기를 진행할까 하다 에라~ 그럼 나라도 이해받고 끝내자 싶었다.
*나: 샘이 네가 이해받고 싶은 게 없다는 얘기를 듣고 순간 멍~했네. 네가 샘한테 불편한 마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음... 그럼. 너는 지금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얘기로 들리는데 맞아?
*연우: 네.
*나: 그럼 혹시 선생님이 이해받고 싶은데 들어줄 마음의 여유가 되니?
*연우: 네.
*나: 그래. 고맙구나. 음... 선생님은 네가 활동지에 쓴 '수업이 초등학생 수준'이라는 얘기나, 카드를 보고 '이런 걸 뭐 하러 2만원이나 주고 사요?' 라고 말하거나, 스티커를 던지는 걸 보고 속이 상했어. 왜냐하면 선생님이 수업 준비를 정말 오래하고 열심히 하거든. 물품도 고민고민 하면서 살펴보고 사고. 그런데 네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이렇게 준비한 게 별 의미도 소용도 없구나 싶은 거야.
*연우: ...
*나: 속상했던 샘 맘이 이해가 가니?
*연우: 네. 준비 많이 하시는 것 같았어요.
*나: 진짜? 네 눈에 그렇게 보였어? 알아봐주니 너무 좋다. 네가 세심하게 보고 있었구나.
*연우: 네. 뭐. 감정 찾는 활동지나... 그런거.
*나: 고맙다. 샘이 소통을 굉장히 중요한 가치로 여겨서 그런 활동들을 하거든. 그런데 아까는 '이런 거 해서 뭐해요?'라거나, '이게 뭐가 중요해요?'라고 말하는 걸로 들리더라구.
(혼잣말처럼) 아니지. 아니지.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지.
*연우: 저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 했는데.
*나: 맞아! 샘이 그래서 진짜 기특하고 고맙더라. 사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할 수도 있는데 활동지도 끝까지 다 채우고 샘이 제시한 활동들을 다 하더라구!
*연우: 네. 할 건 해야죠.
*나: 그래. 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지루하거나 의미 없다 여겨지더라도 끝까지 해보는구나. 분명하고 멋지다. 사실 샘이 소통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고 너한테까지 이래야한다, 좋게 받아들여라 강요할 생각은 없어. 다른 걸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지.
그런데 너의 말이 샘한테는 '샘 수업 재미없어요.', '샘 수업 잘 못 해요.'라고 비난이나 평가하는 말로도 받아들여지는 거야. 그래서 자괴감이 들었어. '내가 수업을 잘 못하나?' 싶어서.
*연우: 저 웬만해서는 누구 평가하고 그러지 않는데..
*나: 그래? 그렇구나. 네 말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이지?
*연우: 네.
*나: 상대를 평가하지 않고 존중하려고 한다는 말로도 들리네.
*연우: 네.
*나: 그래. 사실 샘도 네가 그런 의도로 말한 거 아닐 꺼라고 생각해. 그런데 '초등학생 수준인 것 같다.'는 말이나, '이런 걸 왜 2만원이나 주고 사요?'라는 말이 생각이나 사실적인 표현만 담겨있어서. 네가 어땠는지는 라기보다는 샘이 어땠는지 얘기하는 것 같아 그렇게 받아들여지더라고. 그래서 샘도 잠시 발끈했던 것 같아.
*연우: 네.
*나: 샘 얘기 듣고는 이해는 되었어?
*연우: 네.
*나: 그럼 샘 이야기 듣고 너도 이해받고 싶은 거 없어?
*연우: 딱히. (시계를 본다. 얼추 10분이 되었다.)
*나: 그래! 벌써 10분이 다 되어가네. 샘도 약속 지켜야지.
마지막으로 샘이 너한테 듣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샘이 말하는 대로 해줄 수 있겠니?
*연우: 네.
*나: 고마워. 샘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맘이 다 풀릴 것 같아.
음... "샘. 수업 준비하느라 애 많이 쓰셨어요."
*연우: 저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활동지나 카드나 준비해오신거 보면 시간 많이 들이고 노력하신 거 같았어요.
*나: 오! 샘 말 그대로 알아주진 않았지만 너의 방식으로 맘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그럼 하나만 더. "샘. 샘은 공감이나 칭찬,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와는 잘 맞지 않아서 좀 지루했어요."
*연우: (순간 씩 웃는다.) 샘이 뭐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알아요. 그냥 저는 자리 옮겨 모둠 만들고 그러는 게 좀 귀찮고, 애들이랑 좋은 이야기 주고 받는 게 익숙치 않아서요. 그래서 좀 오글거리고 유치하게 여겨지고 그랬던 것뿐이에요.
*나: (함박 웃음이 나온다. 듣고 싶었던 얘기다.) 그래. 그랬구나. 샘이 네가 정말 이해가 돼. 샘도 존중받는 기분이고 너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겠다 싶고. 네가 이해가 되니 샘이 마음이 참 편하네.
*연우: 네.
*나: 고맙다. 약속 지켜서 방과 후인데도 오고, 샘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너와 맞지 않아도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이제 10분 되었으니 가자.
*연우: 네. 안녕히 계세요.
*나: 그래. 잘가.
대화를 나누고는 아이가 좀 더 보였다. 나 혼자 유추하며 ‘그래서 그랬을거야~’ 넘겨짚었던 것보다, 직접 아이의 입으로 확인하니 속이 다 시원하고 이해되었다. 그래도 오늘 지나가다 복도에서 마주치는데 좀 민망하고 뻘쭘했다. 아이도 그런 것 같았다.
좀 묘한 것은 그 아이를 대하면서 자꾸 권위와 관련된 생각들이 올라온다. ‘감히 어른인 나를 평가해? 감히 샘이 준 스티커를 던져? 교사인데 내가 아이에게 이해를 구걸한 거 아닌가?’ 뭐 이런 생각들...
내 CP도 같이 대응하나보다. 이런 마음의 흐름들 때문인지 예전엔 CP아이들과 꽤나 기 싸움을 했던 것 같다. 막막 눌러주고 싶은 마음들이 불끈불끈!
지금은 아이와 좀 뻘줌하지만, 관계의 방향을 튼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대화를 복기하면서... 이게 과연 잘 나눈 대화인가? 의구심이 들고 부끄럽고 창피한 맘들을 본다. 제길 이놈의 무능감!!!
대화하면서 '네가 그렇게 표현해서 내가 불편했어!'류의 '네 탓'성 발언을 몇 번 했던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는다. 아름다운 기억만 고이 남기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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