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석 (소망)
10일간의 연휴를 끝낸 10월 10일(화) 2교시
나 : 얘들아, 오늘은 이육사의 광야라는 시를 배워보려고 해.
26명 중 6~7명은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고, 나머지 15명 정도는 자기 세계와 수업을 왔다갔다 하는 것 같고, 6~7명은 엎드려있다. 나도 수업하기 싫다.
나 : 일제강점은 언제부터 시작된 거야?
학생 몇몇 : 1910년~
나 : 올해가 2017년이니까 약 100년 전을 배경으로 쓴 시네. 궁금한데, 일제강점기에 쓴 시를 배우는 것은 너네들에게 어떤 의미야?
학생들 : ...
나: 시를 읽으면 이해가 되긴 해?
학생들 : ...
칠판에 적는다.
“주제 : 일제강점기 시를 배우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나 : 이 주제에 대해서 국어 노트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적어 보렴. 꼭 어떤 의미를 찾아서 쓰라는 건 아닌 거 알지? 이 주제를 받고 드는 생각과 감정을 적는 거야. 나는 너희들 각자의 솔직한 생각과 감정을 듣고 싶거든.
(나도 이 주제에 대해서 써 보고 싶었다. 그래서 프로젝션 TV와 연결된 PC에 몇 자 적기 시작했다.)
제목 : 나에게 100 여년 전 일제강점기 시를 가르치는 것의 의미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학생들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을 가르치고 싶은데, 이 시를 배우는 것이 학생들에게 어떤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어서 가르치는 것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정해진 교과서의 진도를 마친다는 의미는 있다. 그래야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갈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가르치는 이유로 부족하다 싶어 아쉽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한 가지 바람이 생긴다. 이런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어떻게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아이들이 느끼게 해 줬으면 좋겠다.”
몇몇 아이들이 내가 쓰는 걸 보고 있었다.
나 : 니네들 국어선생님들이 쓴 글 본 적 있어? 부끄럽지만, 샘은 이렇게 글을 써. 한번 들어볼래? (내가 쓴 글을 읽어줬다.)
지우 : 역시 국어선생님이라 길게 쓰네.
나 : 이게 길구나? ㅎㅎ 고마워. (지우가 웃는다.) 자, 이제 니네들 것 들어보자. 오랜만에 깨어있는 강민이!
강민 : 안 썼는데요~
나 : 그럼 말로 해봐.
강민 : 음,, 저한테는 의미가 없어서요. 공부 자체가 의미 없으니까요.
나 : 공부 자체가 의미 없구나. 그럼 뭐가 너한테 의미 있어?
강민 : 음... 노는 거요.
나 : ‘음...’ 이러면서 생각하다가 노는 거라고 이야기하는 걸 보니 의미 있는 걸 생각 별로 안 해 본 것 같은데, 너한테 의미 있는 걸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그게 뭐든.
강민 : 네..
나 : 자, 이번엔 누가 할까?
준영 : 제가 해 볼게요. (평소 수업시간에 말이 많지 않은 아이다. 반가웠다. 더군다나 발표를 자원하는 아이가 있다니 더욱더.)
-다음은 준영이의 글-
“일단은 감성적으로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아마 이 시를 그 당시에 읽었다면 의미 해석이 바로 되었을 것이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런 시는 마치 얼려놓은 냉동식품 같은 느낌이 든다. 녹이지 않고 먹으면 무슨 맛인지 잘 모르지만 요리하기 위해서 녹이면 즉, 해석하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듣고 있던 4~5명 정도 아이들이 감탄을 한다.
나 : 야, 준영이가 이런 생각하고 사는지 알았어?
학생 몇몇 : 아니요.ㅎㅎ
나 : 준영아, 너의 발표 엄청 대단해!! 그러니까 감성적으로 다가오지는 않고, 마치 얼린 냉동식품처럼 그 자체로는 무슨 맛인지 모르지만 요리를 하면 무슨 맛인지 알겠다는 말이지?
준영 : 네, 평소 이런 시를 배울 때마다 어려웠던 것 같아요.
나 : 아, 어려웠구나.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되었나?
준영 : 뭐.. 그런 것 같아요.
나 : 말 하고는 어때? (이걸 물을 때 나는 긴장이 된다. 상대의 반응을 확인한다는 게 나에게는 두렵고 불안한 일이다. 순간 몸이 위축됨을 느낀다.)
준영 : 뭔가 오랫동안 막혔던 게 조금은 뚫리는 기분이요. (담담하게 말한다. 준영이는 원래 담담한 아이다.)
나 : 그래, 가볍고 시원하겠다. 난 니 말을 들을 수 있어서 참 좋다. 특히 얼려놓은 냉동식품이라는 비유, 정말 감탄스러워.
그렇게 끝이 났다. 다음 수업 시간.
나 : 자, 오늘 나는 냉동식품을 요리해봐야겠다. 한번 같이 해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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