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석 (소망)
학년말, 성적 처리도 끝났고 진도는 다 나간 상태. 아이들은 드라마를 틀어달라고 난리였다. 못 이기는 척, 생기부 작업도 할 겸 그리 해 주고 있었다. (이런 나의 수업 실태를 적자니 민망하다.^^)
여자반 6반에 들어갔더니 여느 때와는 다른 분위기. 아이들 예닐곱이 모여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나 : 야, 니네들 무슨 일 있어? 웬일이야, 드라마 틀어달라고 난리더니.
학생 : 선생님은 모르셔도 돼요.
나 : 엥?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겼나 보네. 왜 그래?
학생 : 저희 반 문제라서요.
나 : 말하기 민감하다는 말이지? 야, 선생님이 갈등해결 전문가야. 몰라? 나한테 얘기 해봐.
학생 : 에이, 선생님은 모르셔도 된다니까요!!
나 : 그래 알겠다. 근데, 반 분위기가 이리 침울해서야 쓰겠니? 선생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테니 그 일을 겪으면서 느낀 기분만 말해 볼래?
학생들 : 죄송해요.
나 : 죄송했구나.
학생들 : 짜증나요.
나 : 짜증났구나.
학생들 : 정말 재수없어요.
나 : 정말 재수없구나.
이리 마음만 알아주니 감정들이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몇몇 아이들이 결국엔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연은 대강 이렇다. 자기네 반 온라인 카페가 있는데, 거기에 익명 게시판이 있단다. 익명 게시판에 요즘 교실에서 핸드폰을 쓰는 아이들이 있다는 고자질을 올린 사람이 있다는 거였다. 담임선생님이 아침 조회에 들어와서 대단히 실망이라고 말하고 나갔다고 한다. 사연을 다 듣고 나니 아까 전에 누그러진 것 같았던 감정들이 다시 요동치는 것 같았다. 사연을 다 듣고 난 후.
나 : 정말 짜증나겠다.
학생들 몇몇 : 네. 정말 어이없지 않아요? 방학이 며칠이나 남았다고.
나 : 어이없겠어. 반 분위기 이상해지고, 핸드폰도 빼앗기고 말이야.
민주(핸드폰 주인) : 핸드폰 빼앗긴 것도 그렇지만, 꼭 담임선생님한테 알려야 했냐구요!
나: 담임선생님한테 알린 게 문제구나.
효은 : 담임선생님이 우리한테 잘 해 줬는데, 실망시켰잖아요.
나 : 많이 미안하구나.
학생들 : 네. 미안하지요.
나 : 그러니까 뭐야, 니네들이 원하는 건 담임샘 화를 풀어드리는 거네.
연수 : 풀어드리고 싶은데, 사과를 안 받아들이실 것 같아요.
나 : 그렇구나. 그게 문제구나. 걱정되겠다. 반 전체 중에서 사과 대표단을 구성해서 찾아가면 어떨까? 반장이랑 몇 명 같이 가서 잘 말씀드리면 되지 않을까?
효은 : 아, 대체 누가 고자질을 한 거야? 꼭 잡아내고야 말거야. 자기도 노래 같이 듣고 좋아했으면서.
나 : (이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휴대폰을 사용했다는 것을 담임에게 알린 그 아이, 교실내에 앉아 있을 그 아이가 걱정이 많이 되었다. 아이들의 마음을 받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게 마치 이 아이들 편을 드는 것으로 비쳐서 또다른 상처를 주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조심스러웠다.) 그렇구나. 밉겠다.
효은 : 네. 당연하지요. 진짜 누군지 잡혀만 봐라.
나 : 에고고, 무서워라. 이미 이 속에 있으면서 많이 혼나는 심정이겠다.
연수 : 뭐가 그래요. 혼나는 건 우리가 혼났는데.
나 : 아이고. 얼마나 화났으면 이러겠냐.. 지금 기분들은 어떠냐?
학생들 : 걱정돼요. 미워요. 화나요. 죄송해요. 짜증나요. 답답해요. 등등의 표현들이 나온다.
나 : 그렇겠다. 어쩌든지 담임선생님 실망시킨 거 사과하고 화도 풀어주고 싶단 말이네.
학생들 : 네.
나 : 대표단을 구성해서 찾아가봐. 가서는 죄송하다고 사과부터 하지 말고, ‘저희한테 실망하셨죠?’처럼 담임선생님 마음도 알아드리고. 그러면 마음 풀릴 거야.
학생들 몇몇 : 그럴까요?
나 : 하고 싶은 마음들이 좀 생기나 보다. 너네들이 좋아하는 담임샘이니 찾아가서 말씀드리는 게 더 죄송스럽기는 하겠다. 담임선생님이 듣고 싶어 하실 말씀은 뭘까? 그걸 가서 말씀드리면 화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효은 : 앞으로는 안 그러겠다는 말이요?
나 : 그것도 좋겠지.
민주 :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해요라는 말이요~.
나 : 그것도 좋네. 이건 어때? “선생님이 저희한테 실망하셨을까 봐서 저희가 걱정 많이 했어요. 그만큼 저희는 선생님 좋아해요.” 이런 말. 선생님은 니네 담임샘이 부럽네. 담임샘 실망시켰다고 이리 난리를 치는 걸 보면 말이야. 니네들도 멋지고. 대단해. 어쩜 이런 반이 있을 수 있을까..
영채 : 선생님, 이제 드라마 봐요~
나 : 엥? (그러고 보니 이젠 드라마를 봐도 될 것 같은 분위기이기는 하다. 드라마를 틀어주려고 하던 순간 뭔가 내 머리 속에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걸 말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 : 아, 생각났다. 담임선생님이 제일 듣고 싶어할 말. 들려줄까?
아이들 몇몇 : 네!
나 : 내가 담임이라면 이런 일로 아이들끼리 갈등이 생길까, 혹은 선생님한테 이 사실을 알린 사람을 찾아낼까 걱정이 많이 될 것 같아. 담임샘께 가서 범인도 안 찾고, 사이좋게 지내겠다고 말씀드려보면 어떨까?
아이들이 기특해서 교무실에 와서 6반 담임샘과 이야기를 나눴다. 6반 아이들과 나눴던 대화에 대해서 말이다. 6반 담임샘이 좋아하는 눈치였다. 보는 나도 흐뭇했다.
돌이켜 보니 학급 전체에 대해서 뭔가 영향력을 미친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로 아쉬운 점이 남기도 한다. 또, 내가 담임반 하는 아이들도 생각났다. 어쩌면 그 아이들도 이런 본심을 가지고 있었을텐데, 내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그 소중한 마음을 받아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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