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현 (디라)
5월 4일 황금연휴에 나는 열과 허리 통증으로 너무너무 아팠다. 퇴근한 신랑이 깜짝 놀라서 몸을 펴지도 못하는 나를 끌고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는 염증수치가 높다며 항생제를 놓아주었다.
그 때도 나는 응급실에서 계속 밤을 새는 것이 싫어서 신랑을 보고 집에 가자고 졸랐다.
신랑이 안된다며 가방을 싸들고 와서 밤을 새는데 미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였다.
끙끙거리며 두세 시간을 지나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머리가 핑 돌고 어지러웠다. 간호사가 와서 혈압을 재 주는데 깜짝 놀라며 혈압이 50이라고 하였다.
나는 50이라는 말을 듣고 혈압이 이렇게 낮아질 수도 있나? 생각하였다.
그 때부터 의사와 간호사가 바쁘게 움직이며 수액을 세 개나 달고 기계를 달아주었다. 그런데 기계가 알람이 자꾸 울린다. 의사가 신랑을 불러 뭐라뭐라 하는데 표정이 심각하였다.
응급차가 와서 나를 큰 병원으로 데려간다고 한다. 나는 물어볼 기력이 없어서 응급차에 누웠는데 신랑이 자꾸 이름을 부르며 정신을 차리라고 했다.
전북대병원에 도착하자 의사와 간호사가 피를 뽑아야 된다며 세 명이 나를 붙들고 주사바늘을 찌르는데 진짜 너무너무 아팠다. 한 명이 서너 번씩 바늘을 찔러대는데 혈압이 낮아서 아무리 해도 피가 안 나온다는 거였다. 나는 정말 비명을 지르고 싶었는데 힘이 없어서 목소리도 안나왔다. 엉엉 울고 싶었다.
의사는 이대로 계속 약을 주입하면 혈관이 썩는다면서 동맥으로 어깨 밑 가슴께에다 관을 뚫자고 했다. 혈관이 썩는다는 말도 무섭고 동맥에다 관을 뚫어야 한다는 말도 무섭고 의사들은 너무 겁을 주는 것 같아서 야속하다.
신랑이 동의서에 사인을 하는데 2차 감염이 어쩌고, 죽을 수도 있고 어쩌고 그런 말도 무서웠다. 병원은 정말 싫은 곳인데 나가자고 할 분위기는 아니어서 그것도 주눅이 들었다. 눈치를 보며 어깨에 구멍을 뚫는 의사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저 많이 안 좋은거에요?
네, 많이요. 아주 많이요.
나는 뭔가 내 상태가 아주 안좋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가 신랑에게 신우신염, 패혈증, 쇼크 어쩌구 하는 것을 들었다. 패혈증이 어떤 병인지 인터넷 검색을 하고 싶은데 양 팔에 주사액이 7개나 달려서 손가락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때 까지도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병가를 4주나 써야 하다니, 그럼 학교일이랑 애들은 어떡하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깨에 관을 뚫고 나서 혈압을 올리는 승압제를 넣기 시작했다.
그런데...약이 들어가는 순간 몸이 튕겨오르며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가슴에 엄청난 통증이 오며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정말 죽을 것 같았다.
혈압 기계가 60에서 180으로 솟구쳤고 옆에 있던 의사 4명이 당황하며 누군가 ‘멈춰!’ 소리를 쳤다. 간호사가 줄을 잡고 약을 멈추자 혈압이 40으로 곤두박질쳤다.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뭔가 정신줄을 놓으면 안될 것 같아서 안간힘을 썼다.
약이 아주 조금씩 들어가자 혈압이 간신히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 때부터 하루 동안은 응급실에서 버텨야 한다고 했다. 신랑은 내 옆에서 혈압 기계의 숫자를 쳐다보며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계속 깨우면서 평소에 잘 하지 않는 사랑한다는 말을 5분 간격으로 해주는 거였다. 나는 좋기도 하면서 웃기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하였다.
지현아, 사랑해.
응? 자꾸 얘기해주니까 듣기는 좋은데. 내가 죽을병에 걸린 것 같잖아.
이런 말은 할 수 있을 때 많이 하는 게 좋아.
그래? 그럼 많이 해줘.
그 때 신랑 눈이 빨개지는 것이 보였다. 뭔가 상황이 심각한 것 같고, 신랑이 너무 안쓰러워보였다. 말을 자꾸 하고 싶은데 열과 통증 때문에 말이 잘 안나왔다. 양가 부모님이 오시고 어머님들이 자꾸 눈물을 보이셨다. 나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하는데 사람들은 다 안괜찮아 보였다. 미안하고, 안심을 시켜주고 싶기도 하고, 한편 몸이 너무 아픈데 옆에 사람들을 보니까 든든하고 좋기도 하였다.
그 날 밤 일반병실로 옮겼다. 그날 밤 통증은 정말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
승압제와 수액과 항생제와 수혈을 동시에 하는데 온 몸에 불이 나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몸이 약을 못 버티는 게 느껴진다.
다음날 아침, 나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호흡곤란이 왔다. 간호사가 나에게 산소 호흡기를 씌워 주는데 가물가물한 의식 사이로 의사들이 10명 가까이 내 앞에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죽 둘러선 사람들 사이로 나이 지긋한 의사분이 내 이름을 계속 부르며 중환자실로 가자고 말씀하였다. 중환자실에 가려고 침대를 움직이는 순간.
병실 벽에 기대어 울고 계신 어머님의 빨갛게 된 눈을 마주하며,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 나는. 정말로 죽을 수도 있는 거구나.
두렵고 아득하였다. 중환자실의 첫날은 열에 들떠 의식이 거의 없었다. 산소 호스를 연결해주며 간호사가 ‘이걸로 호흡 못하시면 기도로 관을 뚫어야 해요. 그건 너무 아프니까. 이걸로 호흡해보세요.’했다. 호스에서는 엄청난 바람세기로 산소가 나와서 숨을 쉬려고 하면 오히려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필사적으로 숨을 쉬었다. 이걸 해야 여기를 나갈 수 있고,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정말 열심히 숨을 쉬었다. 아침에 중환자실 담당 선생님이 잘 버텼다고 하시며 웃어주시는 모습을 보며 안심이 되었다.
둘째날 의식이 돌아오면서 너무 힘이 들었다. 지압기계에 묶여진 다리조차 내 맘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에서 하루 종일 천장을 보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사람들을 면회할 수 있는 시간은 아침8시, 저녁 8시 30분씩 딱 두 번 뿐이고, 그 외의 시간은 정말 외롭게 스쳐가는 여러 가지 마음들과 생각들과 싸워야 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은데 자꾸 생각이 안 좋게 흘러간다.
내 바로 옆에 있던 침대의 환자가 운명하여 가족들이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얀 천이 얼굴에 씐 채 침대가 들려나갔다. 나의 오른쪽 침대에서는 기도관을 뚫는 수술을 하였다. 칼로 가슴을 뚫고 기계가 피를 뽑아내는 소리, 수술을 하는 소리, 의사들이 말하는 장면 모든 것이 다 들리고 보였다. 등골이 오싹하고 쭈뼛쭈뼛하였다.
그러고 나서 나의 밥이 나왔다. 중환자실에서 스스로 수저를 들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오른쪽을 바라보니 아까 수술을 한 할아버지의 가슴에 뚫린 관으로 링거에 연결된 죽이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받은 죽이랑 똑같이 생긴 거였다. 그걸 보는데 왠지 울컥하고 마음이 아팠다. 저렇게까지 해서도 살아야 하는 건데, 너무 아프고 힘들어보였다.
눈물이 차오르지만 수저를 들고 죽 다섯 숟가락을 억지로 먹었다. 이 침대 위에서 내가 살아서 나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밖에 없었다. 숨쉬기, 음식 먹기, 시간을 참고 견디기-이걸 열심히 하면 나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렇지만 의사선생님은 염증수치가 정상인은 5인데 나는 220이라 너무 높아 위험하고, 폐에 물이 차고, 심장 기능에도 이상이 와서 아직 중환자실을 나가면 안된다고 했다. 가족들이 왔을 때 나는 눈물이 퐁퐁 나왔다.
여기서 나가면 안돼요? 여기 있다가는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의사 선생님이 하루만 더 있으래. 호흡이 불안정해서. 하루만 있으면 내일은 꼭 보내준대.
내일은 진짜 보내줘? 그럼...하루만 참을게.
가족들을 보면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딱 30분만 볼 수 있었다. 그것도 한번에 3명만 보내주니까 3명씩 10분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보면 내가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면회 시간이 끝나고 가족들이 나가고 나면...그 밤 시간은 정말 괴로웠다.
천장을 보면 천장의 얼룩이 저승사자처럼 보여서 무서워서 눈을 질끈 감았다.
감았다가 살짝 눈을 뜨고 다른 모습으로 상상해보았지만 자꾸 그렇게 보여서 눈을 뜨기도 무서웠다. 천장에 사람들이 스쳐지나갔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무슨 일을 해왔는지,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가 않았다. 오로지 사람들만 생각이 났다.
가족들, 친구들, 우리 반 아이들, 학교 선생님들, 마리 사람들...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이야기라도 한 번 더 나눌걸. 여기서 죽으면 인사도 한번 못하고 다시는 못 볼 텐데 생각하니까 눈물이 계속 나고 마음이 아팠다. 좀 더 사람들과 만나고 나누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못본다고 생각하니 너무 무서웠다. 예전에 ‘죽으면 다 끝이야’, ‘죽으면 그만이지 뭐’, ‘차라리 죽는게 나아’하며 냉소적으로 이야기하던 철없던 내 모습이 떠오르고 그 말들이 가슴 아프게 후회가 되고, 내가 벌을 받은 것 같았다.
그렇게 숨도 못쉬고 꺽꺽대며 울면서 문득,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나는 정말 살고 싶었다.
너무너무 살고 싶고, 살아서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죽는 거 따위 두렵지 않다고, 죽는 것보다 못하게 살아서 뭐하냐고 말하던 그 순간에도 나는 정말 살고 싶었고, 그래서 그런 말들을 내뱉었던 거였다. 좀 더 잘 살고 싶고, 제대로 살고 싶어서 한 말들이었을 뿐.
그 때에도 나는 정말로 살고 싶어했던 사람이구나. 알아차려졌다.
그리고 살고 싶은 이유는...살아서 너를, 당신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자 눈물이 그쳤다. 살고 싶다. 살아서 나가고 싶다.
살기 위해서 나는 잘 버티고 있으니까 살아서 나가서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제서야 눈물이 멈추고 숨이 쉬어졌다. 그렇게 3일을 버텼다.
3일 만에 일반 병실로 갔더니 병실이 천국 같았다. 사람들이 힘들다고 말하지 말라하는데 나는 너무 행복해서 자꾸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옆에 누군가가 함께 있고 얼굴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신나고 행복하고 병이 당장 나을 것 같았다.
차가운 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는 것, 밤에 편히 잠을 잘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얼굴보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 무엇보다 삶 그 자체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살면서 자꾸만 허전해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무언가 채울 것을 열심히 찾던 내 모습이 떠오르며 살아있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생각하였다.
병실에서 일주일간 병간호를 하던 엄마는 내게
‘네가 아픈 것은 정말 안타깝지만, 너랑 이렇게 함께 오래 있어본 것은 10년만인 것 같다. 엄마는 너랑 함께 오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이 순간이 참 좋다.’라고 했다.
좁은 병실 간이 침대를 쓰면서도 나와 함께 있어서 행복하다는 엄마 말에 눈물이 나왔다.
일주일간 내 옆에 머무르며 청소와 설거지를 하고 커다란 수박을 고집을 부리며 제일 비싼 걸로 두통이나 사놓고 가시는 아빠의 뒷모습에 눈시울이 시큰하였다. 신랑도, 시댁 식구들도, 기도해준 사람들도 너무나 고맙다. 나는 내가 이렇게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껴본다. 참 행복하고 감사하고, 눈물이 난다.
빨리 건강해져서 힐링 센터 가족들 얼굴 보고 싶어요. 그립고, 보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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